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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

왜 나쁜 기억은 더 오래 남을까? – 생존 본능과 기억 강화

by 알고하루 2025. 4. 20.

좋은 기억은 흐릿해지고, 나쁜 기억만 선명하게 남는 이유는?

누군가와의 여행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풍경을 봤던 기억보다, 갑자기 내뱉은 상처 주는 말 한마디가 더 오래 남는 경험, 한 번쯤 있으셨을 겁니다. 혹은 시험에서 실수한 기억, 발표 중 머릿속이 하얘졌던 순간처럼 부끄럽고 불쾌했던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생생하게 떠오르곤 하죠. 왜 우리는 긍정적인 기억보다 부정적인 기억을 더 또렷하게, 더 오래 기억하는 걸까요?

이는 단순히 기분 탓이나 성격 때문이 아닙니다. 뇌는 원래 위험 요소를 감지하고 생존에 도움이 되는 정보에 더 집중하도록 진화했습니다. 나쁜 기억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뇌의 생존 전략이며, 그 과정에는 감정 처리와 기억 저장에 관여하는 특정 뇌 영역들이 깊이 관여합니다. 이 글에서는 그 이유를 뇌과학적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풀어보겠습니다.

 

감정과 기억을 연결하는 편도체의 역할

기억이 단순히 정보만을 저장하는 저장소라면, 우리는 중립적인 사실만을 기억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억은 감정과 함께 저장되며, 그 감정을 처리하는 핵심 기관이 바로 편도체(amygdala)입니다. 이 편도체는 공포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동시에 해마(hippocampus)와 협력하여 해당 경험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할지를 결정합니다.

즉, 감정의 강도가 클수록 편도체는 더 활발히 반응하고, 해마는 그 경험을 “중요한 정보”로 간주하여 깊이 각인시킵니다. 그래서 공포, 수치심, 분노처럼 감정적으로 강렬한 순간은 우리 기억 속에 더 깊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생존 본능이 만든 ‘부정적 편향’

진화적으로 보면,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을 더 오래 기억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 열매를 먹고 배탈이 났던 경험을 기억한다면, 다시는 그 열매를 먹지 않게 되죠. 혹은 어느 장소에서 맹수에게 쫓긴 적이 있다면, 뇌는 그 장소를 위험 지역으로 인식하고 자동 회피 반응을 만듭니다.

이러한 작용을 부정적 편향(negative bias)이라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뇌가 나쁜 사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기억을 반복 재생하며, 더 오랫동안 저장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과거의 실패나 상처가 쉽게 잊히지 않는 것은 뇌가 의도적으로 위험 회피 메커니즘을 활성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나쁜 기억은 왜 반복 재생되는가?

여러 해가 지났어도,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일이나 실수한 순간이 문득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요? 이는 뇌의 ‘되감기 회로’라 불리는 기억 재처리 시스템 때문입니다. 특히 편도체와 해마 외에도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이 이 과정에 관여합니다.

전전두피질은 정보를 분석하고 감정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데, 부정적인 기억이 떠오를 때 이를 논리적으로 해석하거나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런데 감정이 너무 강할 경우, 전전두피질의 통제가 약해지고 오히려 기억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플래시백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는 뇌가 위험 신호를 계속 상기시키려는 본능적인 작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 나쁜 기억은 더 오래 남을까? – 생존 본능과 기억 강화

스트레스와 기억 고착의 연결고리

강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뇌에서는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이 호르몬은 단기적으로는 위험에 대처하도록 도와주지만, 장기적으로는 해마의 기능을 저하시키고, 편도체의 민감도를 높입니다. 결과적으로 부정적 기억은 강화되고, 긍정적 기억은 흐릿해지는 효과가 나타납니다.

다음은 스트레스 호르몬과 기억 처리의 상호작용을 간단히 정리한 표입니다.

요소 주요 뇌 부위 작용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 해마 기억 저장 능력 저하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 편도체 부정적 감정 과잉 반응
만성 스트레스 전전두피질 감정 조절 능력 약화

이러한 작용은 특히 어린 시절이나 청소년기에 경험한 부정적 사건일수록 더 강하게 작용하며, 이후의 감정 처리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나쁜 기억을 줄일 수 있을까?

기억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회상될 때마다 수정될 수 있습니다. 이 현상을 ‘재인코딩(reconsolidation)’이라고 부릅니다. 즉, 과거의 부정적 기억이 떠올랐을 때, 그 기억에 새로운 의미나 감정을 부여하면 기억 자체도 변화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발표 중 실수했던 기억이 떠오를 때 "망쳤어"라고만 생각하기보다 "그 실수 덕분에 다음엔 훨씬 나아졌지"라는 식으로 해석을 바꾸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처럼 뇌는 반복된 해석과 감정 조절을 통해 부정적 기억의 힘을 약화시키고, 더 균형 잡힌 감정 반응을 만들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경험을 더 잘 기억하는 법

부정적 경험에 비해 긍정적인 경험은 대체로 덜 강렬하게 저장되기 때문에, 의도적인 집중과 반복이 필요합니다. 감정적으로 기뻤던 순간을 되새기거나, 감사한 일을 일기처럼 적는 행동은 해마와 전전두피질을 활성화시켜 긍정적인 기억 형성에 도움을 줍니다.

또한 긍정적인 기억은 세로토닌, 도파민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를 유도하여, 뇌의 보상 시스템을 자극하고 스트레스로부터의 회복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일상 속 작은 즐거움이라도 의식적으로 되새기는 습관이 뇌 건강을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나쁜 기억은 뇌의 보호 본능

나쁜 기억이 오래 남는 것은 결코 당신의 의지가 약해서도, 부정적인 성격 때문도 아닙니다. 그것은 위험을 피하고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한 뇌의 전략이자 본능입니다. 하지만 이 본능이 지나치게 작동하면 삶의 질이 떨어지고, 긍정적인 경험조차 제대로 저장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뇌는 변화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부정적 기억도 다시 해석할 수 있으며, 의도적인 긍정 경험의 축적은 기억 시스템 자체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나쁜 기억을 없애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기억에 끌려가지 않도록 뇌를 훈련하는 것, 그것이 뇌과학이 제안하는 건강한 기억의 방식입니다.